_폴 E. 리틀(Paul E. Little) 지음
하나님(신)의 존재 여부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확실히 아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그가 우리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알았는데 그가 아돌프 히틀러와 같이 변덕스럽고 편견이 있고 잔인하다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먼저 인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드러남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하나의 선명한 사례가 있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의 작은 마을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마구간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예수였다. 예수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살았고, 그 후 3년 동안 공적인 목회를 했다. 이것은 역사의 맥락을 바꾼 운명이었다. 그는 친절했고, 보통 사람들은 그의 말을 즐거이 들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마태복음 7:29).
하지만 곧 예수는 자신에 대해 깜짝 놀랄만한 말을 한다. 예수는 자신을 비범한 선생이나 선지자를 넘어선 존재로 시인했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신)이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정체에 초점을 맞춰 가르쳤다.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했다. 제자인 베드로가 “당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십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예수는 충격을 받지도, 베드로를 야단치지도 않았다(마태복음 16:15~16). 오히려 예수는 베드로를 칭찬했다.
예수의 발언은 주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성경은 “유대 사람들은 이 말씀 때문에 더욱더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러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셨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요한복음 5:18). 심지어 예수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나님을 매우 신성시해서 ‘하나님’이라는 단어조차 입 밖에 내는 것을 꺼리는 유대인들 입장에서 이 말은 그들을 매우 화나게 했다. 그들은 곧바로 예수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다. 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느냐는 예수의 질문에, “우리가 당신을 돌로 치려고 하는 것은, 선한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하였소.”라고 대답했다(요한복음 10:33).
예수의 명백한 주장은 오직 하나님의 권위로만 할 수 있었다. 몸이 마비된 사람을 치료해 주는 과정에서 예수는 “네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한단 말이냐?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마가복음 2:7)라고 생각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선동시켰다. 예수는 목숨이 위태롭게 된 순간에도 "네가 찬송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내가 바로 그이요. 당신들은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라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은 자신의 옷을 찢었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들이 더 필요하겠소?”(마가복음 14:61~64)
이처럼 예수의 주장은 명백하다. 예수를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요한복음 8:19; 14:7). 예수를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다(12:45; 14:9).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다(12:44; 14:1).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마가복음 9:37). 예수를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과 같다(요한복음 15:23). 예수에게 영광 돌리는 것은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는 것과 같다(5:23).
예수의 주장을 직면하면서 우리는 오직 네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예수는 거짓말쟁이, 정신이상자, 전설, 아니면 진리이다. 만약 예수가 진리가 아니라면 우리는 의식하든 안 하든 자동으로 세 가지 선택 중 하나를 인정하는 것이다.
(1) 한 가지 가능성은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한 말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이 아닌 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말을 듣는 자들에게 본인의 가르침에 대한 권위를 가지려고 고의로 속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할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예수의 신성을 부인한 사람들도 예수가 위대한 윤리선생이었음을 단언한다. 예수의 정체가 의도적인 거짓말쟁이라면 예수는 위대한 윤리선생일 수 없다.
(2) 약간 충격적인 두 번째 가능성은 예수가 미쳤다는 것이다. 이 가능성이 맞다면 그 자신도 속은 것이다. 오늘날도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예수의 삶을 볼 때, 미친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이상이나 불안정을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그는 절박한 상황에서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3) 그다음 가능성은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이야기가 전설이라는 것이다. 3~4세기에 예수를 열광적으로 따랐던 사람들이 소문을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전설이 아니라는 것은 현대 고고학이 밝혀냈다. 예수에 관한 전기는 예수가 활동한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살아있을 당시에 쓰였다고 확정적으로 결론이 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고학자였던 윌리엄 F.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는 복음서들이 AD 70년 후에 쓰였다는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보다 이전에 쓰여졌다.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채 보급되고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일은 별세한 존 에프 케네디가 자신이 하나님이었다고 주장하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는 내용의 전기를 쓰는 것과 같은 별난 일이다. 이 일을 실제라고 주장하기엔 아직 케네디를 아는 사람들이 많음으로 너무나 터무니없다. 이런 것처럼 전설이라는 가능성은 복음서들이 쓰인 시기에 비해 설득력이 없다.
(4) 마지막 가능성은 예수가 진실을 말했다는 것이다. 한쪽의 견해에서 바라볼 때 예수의 주장은 별로 의미가 없다. 말하는 것은 손쉽게 할 수 있고, 누구라도 주장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사례들이 있다. 나도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수 있고, 당신도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필요하다. 나의 경우에는 당신이 5분 안에 내 주장을 반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당신의 주장을 반증하는데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의 경우는 간단하지 않다. 예수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면, 나를 믿지는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라고 예수는 말했다(요한복음 10:38).
첫 번째로, 예수의 도덕성이 예수의 주장과 일치한다. 정치범수용소 수감자들은 자신들이 유명인사이거나 신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대부분 그들의 인격으로 거짓임이 밝혀진다. 예수의 경우는 다르다. 예수는 “너희 중에 내가 죄인이라고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라고 당당히 말한다(요한복음 8:46).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서 죄를 찾아낼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예수의 인격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가 유혹을 받기는 하지만, 죄를 지은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나와 있지 않다. 밝게 비치는 빛에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더러운 부분이 보이는 것처럼, 사람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자신의 실패와 도덕적 부패, 그리고 결점을 발견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다. 죄가 없기 때문이다. 온 세대의 성자와 신비주의자들과 비교해 볼 때, 예수가 윤리적으로 실수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요한, 바울 그리고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도 모두 예수님의 무죄함을 이야기한다. 베드로는 “그분은 죄가 없으시며, 거짓을 말한 적도 없으십니다.”라고 고백했다(베드로전서 2:22). 예수의 친구가 아니었던 빌라도도,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라고 말했다. 이 말에 빌라도가 예수의 결백함을 인식한 것이 함축되어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목격한 로마의 한 군인은 “이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말했다(마태복음 27:54).
두 번째로, 예수는 자연의 힘을 초월한 능력을 드러냈다. 창조자인 하나님만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을 보인 것이다. 예수는 폭풍으로 휘몰아치는 갈릴리 바다의 바람과 물결을 잠잠하게 했다. 예수가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는 배에 있던 사람들은 “이분이 어떤 분이기에 바람과 파도도 순종하는 것일까?”라고 말하기도 했다(마가복음 4:41). 예수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고, 5000명을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배불리 먹였다.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었고, 소망이 산산이 부서진 아버지의 죽은 딸을 살려주었다. 오랜 친구에게 “나사로야 일어나라”라는 말씀으로 극적으로 그를 죽음에서 구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의 적들이 이러한 기적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에 대한 소문이 더 퍼지는 것이 두려워 예수를 죽이려고만 했다. 그들은 “만일 우리가 이 사람이 하는 대로 계속 내버려 둔다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다.”라고 말했다(요한복음 11:48).
세 번째로, 예수는 질병과 아픔을 초월한 능력을 드러냈다. 예수는 절름발이를 걷게 하고, 벙어리를 말하게, 장님을 보게 했다. 예수의 치유는 선천적인 질병의 문제를 치유한 것이다.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장님의 경우이다. 그 사람은 이론적인 질문들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의 경험은 그를 확신시켰다. 그 사람은 “내가 아는 한 가지는 전에 내가 앞을 보지 못했으나 이제는 본다는 사실이다.”라고 선언했다(요한복음 9:25). 그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신기해했다. 그는 “나면서부터 앞 못 보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말을 들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다(요한복음 9:32). 그의 증거는 명백했다.
네 번째로, 예수의 신성을 확증하는 최고의 증거는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는 자신이 죽을 것을 5번이나 예언했다. 또한,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 그리고 3일 후에 부활해서 제자들에게 나타날 것을 예언했다. 기독교를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 모두 예수의 부활이 믿음의 근본인 것을 인정한다. 유명한 사도 바울도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하는 것과 믿음이 헛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고린도전서 15:14). 바울은 그의 모든 믿음을 예수의 부활에 근거하고 있다. 예수가 부활했든 하지 않았든 둘 중 하나일 뿐이다. 만약 예수가 부활했다면 이것은 모든 역사를 통틀어 세상을 가장 깜짝 놀라게 할 사건이다.
만약 예수가 부활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갈 수 있을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갖게 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현실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주제일 뿐이고 사자 앞에서 찬송을 부르며 죽어간 순교자들, 에콰도르와 콩고에서 복음을 전하다 생명을 바친 선교사들은 그저 예수의 말에 현혹된 불쌍한 바보들일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공격은 부활에 제일 집중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일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1982년 영국의 한 저널리스트 프랭크 모리슨(Frank Morrison)은 부활이 그저 전설이나 상상일 뿐이라고 확신했다. 이것이 기독교 믿음의 기반이 되는 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기독교의 사기성과 기독교가 미신임을 세상에 드러내기로 했다. 그는 오늘날의 법정에서 허용되는 엄격한 기준을 사용해서 그에 해당하는 증거만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조사를 하는 동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부활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공격하기 쉽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누가 돌을 옮겼는가? (WHO MOVED THE STONE?)』라는 책을 쓰면서 자신이 어떻게 설득되었는지, 그리고 원래의 목적과는 정반대로 예수의 부활이 사실임을 밝혔다.
예수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유대인들은 이 형벌이 신성모독의 대가라고 했다. 예수는 사람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심하게 고문당한 후에 예수의 팔목과 발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는 천천히 질식당하며 죽었다. 죽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예수의 옆구리는 칼에 찔렸다. 예수의 몸은 천으로 둘러싸이고 45kg의 끈적끈적한 향료로 덮였다. 예수의 시체는 단단한 돌무덤에 안장되었고, 1~2톤가량의 돌이 무덤 입구를 막았다. 예수는 3일 후에 부활할 거라고 자신이 예언했기 때문에, 훈련된 로마 병사들이 무덤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무덤이 정부재산이라는 로마의 공식적인 인장이 붙여졌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3일 후 예수의 시체는 사라졌다. 오직 예수의 몸을 싸고 있던 천만이 모양을 간직한 채 남아있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은 무덤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쪽에서 발견됐다.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것에 대해 제일 먼저 제시된 가설은 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쳤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8:11~15은 파수병에게 예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파수병들에게 돈을 주면서 그들이 잠들었을 때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설명하라고 말했다. 그 이야기는 너무 황당하여서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잘못을 밝히지도 않았다. 만약 당신이 잠자는 동안 당신의 이웃이 집에 들어와서 텔레비전을 가져갔다는 것을 자면서도 알았다고 한다면 그 말을 어떤 재판관이 믿겠는가? 누가 자는 동안 일어난 일을 알 수 있는가? 이런 증언은 어떤 재판소에서도 웃음거리밖에 안 된다. 더군다나 이것은 심리적이고 도덕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가 아는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시체를 훔칠 사람들이 아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면, 고의적인 제자들의 거짓말로 인해 수천 명의 사람이 속고 최종적으로 죽임을 당한 꼴이다. 이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고 만약 몇 명의 제자들이 음모를 꾸며서 도둑질을 하였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이야기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각각의 제자들은 그들의 사명과 믿음 때문에 고난과 순교의 시험을 직면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것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위해서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가져갔다면, 그리고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우리는 예수의 출현을 설명해야 한다.
두 번째 가설은 유대인이나 로마인이 시체를 옮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까? 파수병을 무덤에 배치했는데 시체를 옮길 이유가 어디 있는가? 사도들이 부활에 대해서 예루살렘에서 담대하게 설교할 때, 권력자들의 침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종교지도자들은 분노로 끓어올라서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것을 막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해서 때리고 위협하며 그들의 입을 막으려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문제에 대한 간단한 답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예수의 시체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은 시체를 예루살렘의 거리에 전시해 놓으면 되는 것이다. 이제 막 시작하려는 기독교를 성공적으로 단번에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의 시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 다른 가설은 슬픔으로 인한 충격으로 여인들이 새벽에 흐릿한 길에서 다른 무덤으로 갔다는 것이다. 무덤이 비어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부활했다고 상상한 것이다. 이 가설 또한 사실일 수 없다. 만약 여인들이 다른 무덤으로 갔다면 왜 대제사장들과 반기독교 세력들은 무덤으로 바로 가서 시체를 꺼내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베드로와 요한이 똑같은 실수를 하였다면 무덤의 주인인 아리마대 요셉이 확실히 이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게다가 예수의 무덤은 개인묘지였지 공동묘지가 아니었다. 그 근처에서 실수로 잘못 찾아갈 무덤이 없었다.
빈 무덤을 설명해주는 또 다른 가설이 있다. 이 가설은 예수가 사실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가 죽었다고 보고되었지만, 사실은 극도의 피로, 고통, 그리고 피를 많이 흘려서 기절했다는 것이다. 시원한 무덤에 뉘어졌을 때 예수가 정신을 되찾았다. 예수가 무덤에서 나왔고 제자들 앞에 나타나서, 제자들이 실수로 예수가 부활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가설은 18세기 말에 처음 등장했다. 그전의 가설들이 예수의 죽음을 강조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예수가 잠깐 기절하고 산채로 무덤에 안장됐다고 가정해 보자. 예수가 3일 동안 습기 찬 무덤에서 음식, 물, 그리고 간호도 없이 생존할 수 있었을까? 시체를 꽁꽁 싼 천을 벗어내고 무거운 돌을 무덤 입구에서 밀어내서 로마 병정들을 이겨내고 대못이 박혔던 발로 걸을 힘이 있었을까? 이런 믿음은 단순한 부활 자체의 사실을 믿는 것보다 더욱 근거가 없다. 부활을 믿지 않았던 독일의 비평가 데이비드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조차도 이 가설은 신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예수가 반 죽은 모습으로 약하게 기어 나와, 붕대를 감고 간호를 받다가 고통에 굴복해서 죽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예수가 죽음과 무덤을 정복한 생명의 왕자라는 인상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 가설이 맞는다면 예수 자신이 극악한 거짓말을 한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죽었지만 부활했다고 믿고 설교했다. 예수는 이러한 그들의 믿음을 오히려 격려했다.
빈 무덤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하는 가설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가 부활했고 예수가 하나님임을 증명한다면, 예수는 오늘도 살아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당신이 자신을 알기 원하고, 당신의 삶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예수는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라고 말했다(요한계시록 3:20).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우리 시대의 주요한 노이로제는 공허함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이 의미와 깊이를 가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예수는 당신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더욱 의미 있고 풍성한 삶을 제시한다. 예수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고 왔다.”고 말했다(요한복음 10:10). 예수는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가지고 죽었기 때문에, 예수는 우리에게 용서와 수용 그리고 진실한 관계로 다가올 수 있다.
지금 당신은 예수를 당신의 삶에 초대할 수 있다. 당신은 “예수님, 저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감사드려요.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제 삶에 와주세요. 당신과 진실한 관계를 맺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다.
► | 예수님을 제 삶에 초대했습니다. (더 도움될 내용을 첨부합니다…) |
► | 예수님을 제 삶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이것에 대해 더 알려주세요… |
► | 질문있습니다… |
폴 이 리틀(Paul E. Little)이 쓰고 빅터 북스에서 출간된 알고 믿읍시다에서 각색하였습니다. 제작권 (c) 1988, SP Publications, Inc., Wheaton, IL 60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