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그 마음 속에 가장 "이상적인" 신적 존재에 대한 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신이라면 뭐든지 가능하고 우리와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돌보는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소개되는 하나님의 특성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인류는 근래에 매우 위대한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조상보다 더 오래 살게 되었고, 더 신속하게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필요한 정보를 순식간에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떤 부분에서 우리는 큰 발전을 이루기는 했으나 그보다 더 많은 부분에서 오히려 퇴보하고 있기도 합니다. 매 십년 간격으로 보았을 때 강력 범죄율, 이혼율, 그리고 십대의 자살률은 크게 증가해 왔습니다. 매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극단적인 분리주의자들의 증오로 인해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전세계 수억 명의 사람들은 만성적인 기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기록들은 끝없이 제시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 자신이 스스로의 운명을 지배하는 신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이들의 말처럼 인간이 신이라면, 우리는 신으로서의 역할을 그리 잘 감당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신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인류보다 훨씬 크고 위대해서 인류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신을 갖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신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초월하시고, 전지전능해서 영원히 존재하며 모든 것을 지탱하고 있는 온 우주의 창조자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바로 내가 친히 이 땅을 만들었으며 바로 내가 그 위에 인류를 창조하였다. 내가 손수 하늘을 폈으며”1라고 했습니다. 또한 “나는 하나님이다.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와 같은 이는 없다.”2,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3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시대에 신에 관한 생각 중 인기가 높은 생각은, 신이란 모든 존재 안에 있는 일종의 세력장(force-field)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신에 의해 존재하고 매순간마다 그 힘에 의해 생명이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그보다 더 많은 의미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을 선택할 수 있다면 부모나 형제 혹은 친구처럼 따스한 신을 갖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당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문제를 상의하고 지도를 받으며 함께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신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는 신이 비인격적이고 알 수도 없으며 멀리 떨어져 있기만 하다면 그런 신을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경의 하나님은 위대하고 모든 것 위에 뛰어난 분이지만 개인적으로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우리에게 나타내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지만, 우리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질문을 하고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으며 그는 우리에게 답을 하고 인생을 지도합니다. 그는 종종 이러한 응답과 지도를,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의 편지라고 알려진 그분의 말씀, 즉 성경을 통해 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까운 가족과 관계를 맺듯이 하나님과도 동일한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를 아는 사람들을 그의 자녀, 그의 신부, 그의 친구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하나님은 결코 비인격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때로는 화를 내고, 슬퍼하며 긍휼과 사랑과 용서를 나타내는 감정적인 존재입니다. 그는 고유한 성품과 재치를 가지고 있는 매우 높은 지능의 소유자 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에 관한 사실 정도만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절친한 친구처럼 친밀하게 그를 알아갈 수 있습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4
어떤 사람들은 신이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신은 온 우주를 창조한 후에 그것이 스스로 작동하도록 내버려둔 존재입니다. 이보다는 우주의 모든 영역에 구체적으로 개입하고 특별히 이 땅 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간섭하는 신을 갖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인간이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고유한 어려움과 책임, 그리고 도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러한 모든 문제들을 이해하고 인생의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신을 갖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인간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형상과 본성을 입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예수]이 계셨다. 그 말씀[예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예수]은 하나님이셨다. 말씀[예수]이 육신[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5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성경은,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하나님의 본바탕의 본보기이시요.”6라고 말합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7입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8이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분”9입니다. 그의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신성이 몸이 되어서 충만하게 머물러 있습니다.”10 그리고 “만물이 그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11
예수는 자신에 대해서,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12,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13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14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또한 완전한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배고픔을 느꼈고, 잠을 잤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식사를 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어려움을 견뎠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도 감당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를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범하지 않으셨습니다.”1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고통을 외면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그 모든 고통을 견디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도 견뎠습니다. 사실 그가 이 땅에서 살 때는 매우 초라한 삶을 살았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외적으로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온갖 편견과 증오를 마주해야 했고, 심지어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마저 그에 대해 오해를 했습니다. 그는 결국 억울하게 사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이들로부터 수용되고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저 표면적인 말이 아닌 진정한 보살핌으로 대해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렇다면 신에 대해서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 우리를 진정으로 돌보고 그 사랑이 실제로 느껴질 수 있도록 사랑해주는 신이야말로 참된 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성경의 하나님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를 돌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16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사랑한다는 말 자체는 사랑의 행동만큼 큰 반향을 주지 못합니다. 이 점이 바로 성경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주 특별하고 놀라운 이유입니다. 성경에서는 그가 실제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 제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18
성경의 하나님은 거룩하고 완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19 그러한 존재로서 맺는 관계 역시 거룩하고 정결하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그 앞에서 깨끗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 그를 향한 길을 낸 것입니다. 예수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았을뿐만 아니라 우리가 저지른 모든 잘못된 행동과 죄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매를 맞고 고문당한 후에 급기야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죽은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신 분에게 우리 대신에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20,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21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 그의 아들을 보내 십자가에 죽게 하실 정도로 우리를 돌봅니다. 하나님은 이 정도로 우리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합니다. 그는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뭐든지, 심지어 우리의 죄를 다루는 일일지라도 기꺼이 감당하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완전히 용서받게 되었고 그 어떤 것도 방해받지 않으며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온 세상에 넘쳐나는 온갖 불행한 일들을 보면 선하고 전능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완전한 신이라도 어떤 경우에는 보다 더 높은 계획을 위해 잠시 동안 나쁜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기도 합니다. 하나님만이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정확히 알고 있으며 또 그의 원대한 계획 아래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존재입니다. 그는 이 땅 위에 그 어떤 일도 그의 허락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완벽하게 모든 것을 다스립니다. “말씀으로 명령하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분이 누구냐? 주님이 아니시더냐?”22, “처음부터 내가 장차 일어날 일들을 예고하였고, 내가 이미 오래 전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을 미리 알렸다. ‘나의 뜻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반드시 이룬다’고 말하였다.”23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24,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25
그러나 이것은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신 일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핵심 중 하나가 바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26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도덕적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지지만 땅에서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지만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라는 이유 때문에라도 그러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하나님께서는 늘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27 결코 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계획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은 지금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환경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음 세상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28
당신의 인생에서 성취한 중요한 임무나 프로젝트에 관해 생각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그것이 다 완수되었을 때 당신이 느꼈던 보람을 생각해 볼 것입니다. 무엇을 성취했든 그게 바로 당신의 인생에서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었나요? 결국 어떤 삶을 이루기를 바라나요? 당신의 삶을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드시고 그러한 목적을 경험하도록 당신을 이끄시는 신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바로 그러한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삶이 의미가 있고 목적 있는 삶이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미리 준비하신 선한 일들을 할 수 있게 됩니다.29 이를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에서도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원대한 계획의 일부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께서는 또한 매 순간마다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며 항상 우리의 가장 좋은 유익을 위해 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30 이것은 우리 인생이 완벽해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삶에는 여전히 질병과 문제들이 있으며 실패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인생이 완벽해지지는 않을지라도 보다 풍성해질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유익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31라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지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진정한 실현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 내면 깊숙이에는 이러한 갈망으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이런 갈망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돈이나 물질적 소유나 로맨스나 오락 등으로 결코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우리의 갈망을 채울 뿐만 아니라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 인생에 항상 만족을 주는 신이 있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습니까?
성경의 하나님이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이룰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러운 삶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3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3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우리의 내적 갈망을 해결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그분이 우리를 처음부터 만드신 방식일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그 하나님이야말로 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또 다른 하나님을 바랄 이유가 없습니다.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굳이 그럴 이유가 또 있을까요? 참된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가장 좋은 하나님이신데요.
이 글은 성경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그저 대략적인 부분만을 다루었을 뿐입니다. 당신이 보다 더 많은 부분을 알아보기를 원한다면 특별히 성경의 “요한복음”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충분히 진지하다면, 그리고 성경의 하나님이 진정 살아 계시다면 그분께서 당신에게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34고 하셨습니다. 또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35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참 하나님을 알 수 있을지 궁금합니까?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하는 일은 결혼 관계의 시작과 여러모로 유사합니다. 먼저는 이 새로운 결혼 관계를 시작하고자 하는 의지적 결정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하고도 진지하게 이 관계를 시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며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그는 이제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는 그분의 은혜를 신뢰한다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36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는 분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영원한 가족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37라고 묘사돼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 인생에서 그 어떠한 죄도 당신이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시작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 죄의 문제는 예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모두 해결하셨습니다. 과거에 당신이 무슨 일을 했든 상관없이 이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당신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일단 당신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하게 되면 그 관계는 영원히 지속되게 돼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그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성장하는, 오늘날 이 땅에서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관계인 것입니다. 다른 모든 관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잘 될 때와 그렇지 못할 때, 최고의 순간과 가장 어려운 순간 그리고 기쁜 때와 고통스러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당신을 만드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당신이 있다는 사실은 영원히 변함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심을 느낍니까? 예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8고 하셨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당신의 삶으로 초청하기를 원한다면, 다음과 같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문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하는 자체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기도문에 담아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저는 제가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저의 모든 죄를 담당하여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저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 예수님께서 저의 구주로 제 삶에 들어오셔서 지금부터 영원히 저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고 저를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예수님을 제 삶에 초대했습니다. (더 도움될 내용을 첨부합니다…) |
► | 예수님을 제 삶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이것에 대해 더 알려주세요… |
► | 질문있습니다… |
(1) 이사야 45:12 (2) 이사야 46:9 (3) 요한계시록 1:8 (4) 요한복음 17:3 (5) 요한복음 1:1, 14 (6) 히브리서 1:3 (7) 골로새서 1:15 (8) 이사야 9:6 (9) 빌립보서 2:8 (10) 골로새서 2:9 (11) 골로새서 1:16 (12) 요한복음 14:9 (13) 요한복음 12:45 (14) 요한복음 10:30 (15) 히브리서 4:15 (16) 요한일서 4:8, 16 (17) 요한일서 4:9-10 (18) 요한복음 3:16 (19) 요한일서 1:5 (20) 고린도후서 5:21 (21) 이사야 53:6 (22) 예레미야애가 3:37 (23) 이사야 46:10 (24) 시편 33:11 (25) 잠언 19:21 (26) 마태복음 6:10 (27) 예레미야 23:20 (28) 요한계시록 21:3-5 (29) 에베소서 2:10 (30) 잠언 3:6 (31) 갈라디아서 5:22-23 (32) 요한복음 10:10 (33) 요한복음 6:35 (34) 잠언 8:17 (35) 마태복음 7:7 (36) 요한복음 6:40 (37) 요한계시록 7:9 (38) 요한계시록 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