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곳에 있습니다. 바로 지금.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면서. 일초가 지납니다. 인생의 또 다른 한순간. 지났습니다. 또 한순간이 지나갑니다. 일초 그리고 일분이 지납니다. 한시간. 하루. 일주일. 일년. 오늘은 이곳에. 내일은 사라집니다.
당신은 지구 어딘가에 있습니다. 바로 지금 무엇을 생각하시나요? 아무 생각이 없으신가요? 아니면 당신은 “더 원한다”는 생각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더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좋은 성적? 친구? 파티? 데이트? 돈?1 씨디? 옷?
원하는 그것을 얻었을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아니면 원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했었을때를… 그 후에 당신이 느꼈던 감정을 기억하십니까? 그 감정은 이렇지 않았는지요, “내가 생각했던 만큼 그것이 내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진 않는군”
그러면 당신은 무엇을 하나요? 처음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당신이 그토록 원했던 경험이나 물건은 어쩌면 당신이 진정 찾고자 하는게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옷. 더 많은 씨디. 더 많은 데이트. 더 많은 파티.
하지만 그래도 당신은 “아직도 더 많은 것을 원해”라는 불편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더 많은 무엇. 하지만 당신은 그 무엇이 뭔지 잘 모릅니다. 그건 당신 인생에 계속되는 가려움과 같습니다. 무엇인가 부족한 느낌. 인생에 무엇이 있다는 느낌. 인생에서 더 많은 무엇을 얻어야 한다는 느낌.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사각형 구멍안에 있는 둥근 못일까? 뭐가 문제지? 나의 문제는 무엇일까?” 가려움은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제것 경험한 것들은 그 가려움을 긁어주지 않습니다.
당연히 당신은 이러한 고민을 당신의 친구들에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당신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들은 반드시 이렇게 말할겁니다, “와… 저 사람은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구나.”
하지만 어쩌면 그들에게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가려움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도 당신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모두 다 침묵의 음모에 눌려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인생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라는 음모에.
당신은 그 가려움이 신과 관련있다고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물론, 신은 우리 곁에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죠. 하지만 신은 또한 우리의 범위 넘어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딜레마입니다. 우리의 가려움을 긁어주기 위해선 우리 세상밖의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만약 인생이 (신에 의해서) 이렇게 우리의 세상안에서 만족될수 없도록 만들어졌다면 어떨까요? 좋은 것들, 이를테면 성공적인 직업, 건강한 가정생활,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 이런것들도 허전함을 남깁니다. 아마 이런 것들도 가려움을 긁어주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이 세상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려움을 긁어주기 위해선 우리 세상밖의 무언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신이 우리가 그를 찾도록2 이렇게 디자인했을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신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를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곳에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더 필요로 하며. 더 원하며. 하지만 당신이 “더” 원하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 찾을수 있는게 아니라면요? 그러면 무엇입니까? 당신은 어느쪽으로 고개를 돌리시겠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예를 보시려면 이곳을 클릭하여 주세요.
요한복음 4:4-18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내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왜 예수님은 이 여자가 남자들과 가졌던 관계를 언급할까요? 그리고 그건 생수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첫째로 예수님은 두가지 레벨로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두 가지 물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중 하나는 우물에 있는 보통물입니다 (평범한 H2O). 다른 하나는 그가 가르키는 대로 “생수”입니다.
이 두 물의 차의점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말하길 평범한 물은 우리의 목마름을 만족시켜주지 못하지만 생수는 우리의 목마름을 만족시켜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수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말하는 생수라는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우리의 영적 목마름을 궁극적으로 만족시켜줍니다. 이걸 인식하며, 당신은 왜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그녀의 남편을 부르게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그녀가 영적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어느 곳을 찾아 다녔는지 깨우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여섯명의 남자를 차지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목말랐습니다. 그 어떤 남자도 그녀의 마음 깊은곳의 갈망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깊숙한 염원과 열망은 이 세상의 것들로 맞춰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만족하기 위해 이 세상 밖의 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의 “생수”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를 알고 그와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목마른” 인생속에 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목마르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합니다,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그는 목마르지 않으리라.” 그를 아는것이 우리의 목마름을 만족시켜줍니다. 우리를 귀찮게 하지만 어떤 것으로도 긁지 못했던 그 가려움을 긁어줍니다.
이야기에서, 그 여자는 영적 목마름을 남자들을 통해서 끝내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실패했습니다. 그 “우물”들은 생수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인생엔 어떤 “우물들”이 있습니까?
종종 사람들은 영적이지 않은 것들로 영혼을 만족시키려 합니다—이를테면 돈, 인기, 육체적인 몸매, 좋은 것들을 가지는것. 그들은 신과 개인적인 관계없이 영혼을 채우려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잘못된 “우물”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님 바로 자신만이 오직 믿을만한 “우물”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 만이 우리에게 “생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주는 물은 선물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받고 싶은 선물입니까? 이것은 지금 당신의 인생에 큰 변화를 줄 것입니다.
► | 예수님을 제 삶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이것에 대해 더 알려주세요… |
► | 질문있습니다… |
(1)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성경, 전도서 5:10)
(2)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성경, 사도행전 17:26-27)